경주한옥게스트하우스다루의 경주여행추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을 소개합니다.

 

다루에서 자차이용 (20분 소요) 거리에 있는 산림환경연구원 추천합니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 하였지만 생소한 분들이 더 많습니다.
주변 관광지로는 선덕여왕릉, 통일전, 서출지, 칠불암과 신선암 등이 있습니다.

 

시내에서 통일전 방향으로 오시다 보면 왼편으로 입구와 주차장이 있습니다.

입장료는 무료... 방문기록을 작성하는 곳이 있으니 작성하는 센스^^

도심에서는 보기힘들 정도로 녹음이 푸르른 산림환경연구원 입니다.

사진 좀 찍는다는 사진작가 들에게는 익히 유명한 출사지로 이미 알려진 곳

 이쁜길과 색감으로 웨딩촬영을 하는 분들의 모습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쭉 뻗은 초록의 메타쉐이어길...

하얀 웨딩드레스 신부와 검정시도 신랑...

다정한 연인...

사랑스런 아이들이 뛰어 다니는 곳

정자에 앉자 도란도란 김밥에 치킨...

 저희 가족도 가끔 다녀오는 곳이기도 하지요

  

아이들과  오신분들을 위한 구간별 설명

 

산림전시실

- 산림에 대한 학술적, 역사적 자료를

보존 ·전시하여 견학과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며,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공간입니다.

 

*온실

-국내·외 희귀 식물을 확보·전시하여

도민의 휴식공간 제공 및 자연학습 교육장을 활용합니다.

 

*동물원

 

-사육기술 보급을 통한 농가소득 증대와 생태계 및

자연보호의 산 교육장 (사슴,닭,타조 등 30종 150마리 사육)

 

 

*약용식물원

-약용식물을 보존, 개발하여

 학술연구와 도민의 정서 함양 증진

 

*수목전시원

- 사라져 가는 식물을 보존, 개발하여

학술연구와 도민의 정서 함양 증진

 

 

*야생화원

-멸종위기의 우수한 우리 야생화 수집,

식재를 통한 희귀유전자원 보존 및 자연생태관찰학습장

 

*무궁화동산

-다양한 품종의 무궁화를 한자리에 모아

나라꽃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고취시킴은 물론 우량품종이 체계적인

보존과 증식 보급을 위한 공간

 

 

*습지원

- 수생식물, 담수어류 등의 습쟁태 관찰장

 

*화목원

-자연친화적이고 주위 경관과 조화되는

향토수종 꽃길 조성 공간

 

*분재원,분재전시실,분재생산포지

 

- 분재의 취미인구 저변확대로

도민의 정서함양 증진과 분재생태관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견학공간이

알차게 배치 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야생화 전시원 

 

위치 : 경주시 통일로 367(배반동)

면적 :12,000

전시품종 : 할미꽃 등 58과231종

식재본수 : 120,000본

 

 

우거진 푸르른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도심의 일상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한

힐링 여행의 장소로 추천합니다..

경주에 있으신 분들도 아이들이랑

다녀오기 좋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사진출사와 가족사진촬영,웨딩,

만삭 사진찍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곳입니다.


연인의 데이트코스,아이들과의 살림욕,가족여행사진 찍기에 좋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가보세요

 

컴터에 남아있는 사진이 정리되지 않아 동영상으로 대신합니다.

아래의 동영상은 가을배경으로 만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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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 Gyeongju National Museum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결성되고, 1915년 옛 객사(客舍) 건물을

이용하여 신라 유물을 수집·전시하였다.

1929년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慶州分館)이 되었으며,

1945년 8·15광복과 함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하였다.

1975년 7월 2일 인왕동 신박물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0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제2별관을 신축하였으며 1994년 경주박물관대학을 개설하였다.

2002년에 미술관을, 2005년에 어린이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조직은 학예연구실과 기획운영과로 운영되며,

박물관은 고고관, 미술관, 안압지관, 옥외전시관,

특별전시관, 어린이박물관으로 구성된다.

고고관은 선사·원삼국실, 신라실 Ⅰ·Ⅱ, 국은기념실로 구성되며,

미술관은 불교미술 Ⅰ·Ⅱ실, 금석문실, 황룡사실로 구성된다.

안압지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 중

예술성이 뛰어난 7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옥외전시관에는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고선사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 등의 석조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소장유물은 8만 여 점이며 그 중 3,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2009년 2월 25일 기준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는 국보 13점, 보물 30점이다.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仁旺洞)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종.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27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신라"라는 의미를

"신들이 생각하건데, '新(새 신) 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뜻이고,

羅(그물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新羅(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셔집니다."

[삼국사기-지중왕4년(504)]

 

 

 

아이와 같이 방문하시면 어린이박물관에서 체험도 해보세요

 

[입장료] 없음. 특별전, 기획전은 유료인 경우도 있다.

[여는 시간] 09:00~18:00 (17:30)

 매주 일요일, 공휴일은 19:00까지.

(3월~12월 중 매주 토요일은 21:00까지 연장 개관)

[닫는 날] 매주 월요일. 1월 1일. (단, 옥외 전시장은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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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한옥게스트하우스다루 오릉을 소개합니다.

 

경북 경주시 탑동()에 있는 능묘()

 

 

사적 제172호. 봉분 높이 10m 내외, 지름 20m 내외이다.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5명의 분묘라 전해진다.

 

 

일명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박혁거세가 승하 후 7일 만에 그 유체(遺體)가 다섯 개로 되어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되었다.

 

 

능 입구의 홍살문을 세운 기둥은 원래 당간지주(幢竿支柱)로

이곳에 담엄사(曇嚴寺)가 있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지정면적 8만 9,950㎡.『삼국사기』등 문헌에서는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모두 5기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閼英),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 유리이사금, 제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제1릉은 가장 남쪽에 있으며

높이 약 10m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크다.

 제2릉은 제1릉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이다.

 제3릉은 제2릉의 동쪽에 표주박 형태[瓢形]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는 약 7.2m이다.

제4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없어 각 능의 구조를 알 수 없으며,

 경주일대에서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원형봉토분의 구조형식이 확인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알려진 피장자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아직 이른 실정이다.

 

 

숭덕전

 

1429년(세종 11) 왕명에 의하여 창건되고

봄과 가을에 향과 축을 하사하여

중사(中祀)의 예로 지낼 것을 정식으로 정하였다.

1723년(경종 3)에 숭덕전의 현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 뒤 참봉은 그 자손이 세습하도록 하였다.

 

 

1752년(영조 28) 다시 묘정에 비석을

세워 신라 시조가 국민에게 끼친 유덕을 기록하였다.

제관으로는 헌관(獻官)ㆍ축(祝)ㆍ장찬(掌饌)ㆍ집준(執尊)ㆍ집사(執事)

ㆍ찬자(贊者)ㆍ알자(謁者) 등으로

숭령전(崇靈殿)의 예와 같으며, 헌관은 관찰사가 왕을 대행하여 지내게 하고,

 관찰사가 부득이한 경우로 제사를 올리지 못할 때는 경주부윤이 대행하였다.

찬품(饌品)에 있어서는 숭령전의 제례에 따라

변(籩) 10, 두(豆) 10, 조(俎) 2, 보(簠)ㆍ궤(簋) 각 2, 작(爵) 3, 희준(犧尊)

 2, 상준(象尊) 2, 산뢰(山罍) 2 등이며, 폐백은 백저(白苧)를 쓰게 하였다.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09:00~18:00
동절기(11~2월) 09:00~17:00

 

입장료

개인 - 어른 1,000원 / 청소년·군인 600원 / 어린이 400원
단체 - 어른 800원 / 청소년·군인 500원 / 어린이 300원
※ 단체 30인 이상

[종합이용권]
* 6종 대상지 : 대릉원, 동궁과월지(舊 안압지), 포석정지, 오릉, 김유신묘, 무열왕릉
개인 - 어른 8,000원 청소년 4,800원 어린이 2,800원
단체 – 어른 6,4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2,200원

* 비고
- 구입처 : 대릉원, 동궁과월지(舊 안압지), 포석정지, 오릉, 김유신묘, 무열왕릉
- 유효기간 : 3일(1곳 이라도 관람 시 환불불가)
- 특기사항 : 관람객 인원수 관계없이 종합이용권 1장에 발권가능

 

 

사진으로 영상 제작한 오릉

경주 한옥게스트하우스 다루에 오시분들은 영상무료제작해드리는거 아시죠

공지사항에 있어요 보시고 필요하신분은 메일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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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한옥게스트하우스다루에서 경주분황사를 소개합니다.

 

분황사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탑 중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멀리서 얼핏 보면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건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벽돌이 아니고 전부 돌로 되어 있습니다.

돌을 일일이 벽돌처럼 작게 깍아서 쌓았다니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벽돌로 쌓은 탑을 전탑(塼塔)이라고 하는데

벽돌탑을 모방해서 벽돌모양의 돌로 쌓은 석탑이라 해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합니다.

 

 

아마 벽돌로 쌓았으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겠죠

원래 이 탑은 7층이나 9층이었고 임진왜란 때쯤 

무너져서 크게 훼손되었을 거라고 추청합니다.

무너진 탑을 3층 까지만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때 복구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쌓았기 때문

돌 모양을 보니 크기가 작고 크고 얇고 두껍고 일정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돌을 쌓아 저렇게 반듯한 모양의 탑을 만들다니

그 기술이 정말 대단합니다.

 

지금 3층만 남은 모습만 봐도

웅장하고 대단해 보이는데 9층까지 있는 모습은 정말 대단 했을 것입니다.

장식적인 면이 많이 없어서 현대적인 단순미가 느껴지는 게

정말 아름다운 탑기단의 모서리에는 석탑을 지키는 4마리의 사자가 있습니다.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은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

  

신라시대 우물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되었다고한다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 우물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이 종소리를 듣는사람은 번뇌가 사라지며

지혜가 생겨나고 고통을 여의며 정신통일이 쉽게 이루어진다는 뜻이 있다고 하네요

 

 

 

 

 

 

경북 분황사 석탑 (芬皇寺 石塔) 국보 제 30호

 

 

입장시간: 오전 8시~오후5시30분
개인
어른(대학생포함) 1,300원,

청소년및군인(중,고생포함)1,000원,어린이800원


단체(30명이상)
어른(할인없음) 1,300원,

청소년및군인(중,고생포함)900원,어린이700원


무료입장
65세이상 경로우대 어른
장애3급까지(보호자 동반1명)
국가유공자(보호자 동반1명)
조계종 신도증 지참하신분
경주시민(신분증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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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한옥게스트하우스 다루 천마총을 소개합니다.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옆에 위치한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발굴한 곳인데,

당시 기술로는 황남대총 같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을 발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는데, 최근 이 천마가‘말’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 관식, 금 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실제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꼭 한번 들려 보길 권한다.

 

 

천마총과 부장품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형태인 천마총은 목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 한 돌과 덧널을 사용해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발굴 당시 봉분은 마치 화산분화구처럼 움푹 들어 가 있어서

봉분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복원해 무덤형태를 알 수 있게

복원한 모습의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천마도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긴 혀를 내밀고 꼬리를 추켜세워 마치 하늘을 나는 듯 묘사된

천마가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해주는데

천마도의 동물이 말이 아니라 이마에 뿔이 있는

 상상속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천마총 금관은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형태로 앞면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이 세 줄이 솟아 있고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두 줄로 그리고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에는 생명력을 상징하듯

돋아나는 싹 모양과 태아형태의 곡옥 장식들이 달려 있다.

 

 

금관 옆으로 금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가 날개를 활짝 핀 모양의 화려한 금장식은

신라 사람들이 쓰는 모자에 꽂는 것으로 추측되며,

금 허리띠에는 물고기와 곡옥, 철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숫돌과 집게 모양을 한 많은 장식들이 달려 있다.


각 모양마다 당시 신라에서 중요시되던 상징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추측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용시간 : 09:00~18:00

입장료

※개인 : 성인 2000원 군경 12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600원

         ※단체 : 성인 1600원 군경 1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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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금장대를 소개합니다.

 

 

금장대는 봉황대와 함께

경주의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있던 절 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 따서

금장대(金藏臺)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은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었다 간다고 하여

경주의 여덟 가지 기이한 현상(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이라 불리워지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 가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그리고 금장대의 아래에 만들어진 예기청소(藝妓淸沼)는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것으로,

김동리의 단편소설인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적이 같이 공존하는 곳이다.

금장대가 위치하는 구릉 전체는 고분군이며,

그중 도굴흔적이 잘 남아 있는

무덤이 남북 두 개의 봉우리 정상부에 각기 1개씩 있다.

 

 

그리고 이곳엔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으로 공덕을 쌓고자 했던 금장사지,

그리고 화랑의 수련터, 조선시대 건물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적이 작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선사시대 때 주거지, 사리공양석상과 거북문석상,

임신서기석, 고인돌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금장대는 시대적인 패러다임에 따라

그 공간적인 의미가 달리 이해되어 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이곳은 시인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던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경주의 넓은 평지에 가장 큰 물길과 물가에 자리한 구릉이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니고 있는

금장대는 이런 다양한 문화적인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이용시간 06:00 ~ 22:00  야경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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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안압지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첨성대와 경주석빙고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무열왕릉,선덕여왕릉,김유신묘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분황사와 황룡사지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감은사지와 이견대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포석정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양동마을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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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는 경상 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으면서 규모가 2,000여 칸으로 커졌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왜군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 때, 금동 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 그리고 돌로 된 다리와 탑만이 불에 타지 않았다.

왜군의 방화로 불타 버린 불국사의 목조 건물들은 광해군 때인

1612년에 경루 · 남행랑 · 범종각 등이 복구되었고,

인조 때인 1630년에 자하문, 1648년에 무설전이 다시 세워졌다.

이어서 1659년에 대웅전이 세워지는 등, 순조 때인 1805년까지

40여 차례의 복원 공사가 계속되면서 안양문 · 극락전 · 비로전 · 관음전 · 나한전 · 시왕전 · 조사전 등이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복원 공사도 중단되었고,

이미 세워졌던 건물들도 낡고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 침략기를 맞았다.

 1924년에 대규모의 보수 공사를 하면서 다보탑을 해체 · 수리하였다.

 그 때 탑 속에서 금동 불상 · 사리 장치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나 행방 불명되었고,

관련된 기록 자료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 후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였다.

이 때, 그 때까지 옛 터로만 방치되어 오던 자리에

무설전 · 경루 · 관음전 · 비로전 · 화랑 등이 복원되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 ·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청되었다.

불국사 경내 면적은 38만 8,570㎢이며,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 국보급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중 잘 알려진 문화재로는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을 비롯해 국보 제21호인

 '불국사 삼층 석탑', 국보 제22호인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3호인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제26호인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 좌상', 국보 제27호인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보물 제61호인 '불국사 사리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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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양동마을을 소개합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

 

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12월 24일에

월성양동마을이란 명칭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면서 경주양동마을이 되었다.
 
마을 내에는 보물 3점, 중요민속자료 12점, 도지정유형문화재 4점,

도지정민속자료 1점, 도지정기념물 1점과 문화재자료 1점이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한계저수지가 있다.
 
마을은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유씨 유복하(柳復河)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 정립의 선구적 인물인 이언적(李彦迪)을 낳아 번성하게 되었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이다.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강동면의 양동마을은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으로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하배집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모두 밭이 되었다.

 

 마을주민들에게는 아직도 유교사상이 짙게 남아 있어

매년 4, 10월에 선조를 제향하는 의식을 마을 공동으로 거행하고 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양동마을 홈페이지 참조하세요  http://yangdong.inv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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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을 소개합니다.

 

저희 다루 인근에 위치한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재위기간 654-661)의 무덤이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려고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백제를 흡수하고

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경주문화 관광 "태종무열왕릉 자세한 설명 링크"

 

계림의 국토 박물관 순례 "태종무열왕릉 자세한 설명 링크"

 

 

 

이 비석(碑石)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661)에 무열왕(武烈王)의 위대한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碑)의 대석(臺石) 이었던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위에 얹혔던 이수 만이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新羅統一)초기(初期)의

씩씩한 기상을 볼수 있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龍)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東洋)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王陵碑)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武烈王)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라 전한다.

무열왕릉의 길건너에 비각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쳐가는 곳이지만 무열왕릉에 왔다면 이곳도 둘러보고 가세요

 

보물 제70호 경주 서악동 귀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비를 세웠던 거북이모양 받침돌이라고 한다.

목을 앞으로 길게 빼 추켜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형상이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없어졌는데, 비석의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단다.

계림의 국토 박물관 순례 "김인문의 묘 자세한 설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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