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벗꽃으로 유명하죠

벗꽃 터널길 따라 올라가면 주차장이 나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소개합니다.

매표소를나 들어가면 나옵니다.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태대각간비

홍무대왕비

선도비각

선도비의 설명

선도비

숭무전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매년 음력 3월 17일과 9월 17일에 향사(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금산재

 

입 장 료

어른 -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청소년·군인 - 개인 600원 / 단체 500원
어린이 - 개인 400원 / 단체 300원
※ 단체관람객은 30인이상에 적용
※ 장애인(1~3급 동반1인), 국가유공자, 경주시민(신분증지참)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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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교리 김밥

 

특징은 단연 김밥 속에 가득 들어간 달걀 지단!

보통 김밥과는 달리 양념을 하나도 하지 않은

맨밥으로 김밥을 싼 다음 살짝 절인 오이와 졸인 우엉,

그리고 볶은 햄을 넣어 김밥의 풍미를 한껏 살려준다.

특히 ‘영혼의 파트너’라고 불리는 부추 잔치국수와 함께 먹으면

고소한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라고 방송 매체에서는 극찬중...

 

백종원의 3대천왕에 방영해서 요즘은 기다림이 장난이 아닙니다.

주말에는 보통 1~2시간 기다려야  맛볼수가 있습니다. 

 

교동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오는 비주로

조선 숙종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 빚기는 9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가 적기이다.

 

원료는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는데 100여일간 숙성시킨다.

숙성된 교동법주는 외관이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이다.

현재 교동법주의 기능보유자는 최경이며, 최국선의 10대손이다.

 

교동법주의 유통기한이 약30일 정도 라는거 참고하세요

 

경주시 교촌안길 19-21

전화번호는 054 - 772 - 2051

홈페이지는 www.kyodongbeobju.com

통일신라 시대 서라벌에 세워졌던 다리.

 세트로 지어진 일성교(경주박물관 아래에 있는 다리)와 함께

경주 월성과 그 남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한때는 나무로 된 다리는 사라지고,

다리 바닥에 있던 석조물만 일부 남아 있었다.(사적 457호)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35대 경덕왕 19년(760)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최소 520년간은 존재해왔다는 말이다.

 

위 사진은 현재 복원 공사중입니다.

 

경주 교동 최 씨 고택(중요민속문화재 27호)이다.


만석꾼으로 이름난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지어져 30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곳이다.


조선 갑부의 집이라는 명성에 비해 나지막한

솟을대문이 검소한 가풍을 전해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단아한 사랑채가 반긴다.
곳간은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장소다.


웬만한 집 한 채보다 큰 건물 앞에 서면 이곳이

곳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12대를 이어온 최부잣집의 창고는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현존하는 가장 크고 오래된 목조 곳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간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행한 공간이다.


보릿고개 때나 흉년이면 쌀 100석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현장인 셈이다.

 

자세한 설명은 향교홈페이지에 나와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www.gyoch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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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서원은 다루에서 도보로 10분정도

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 명종(明宗) 16년(1561년)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경주의 옛 신라 때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했고,

특히 통일 사업의 큰 공훈이 있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과

각간(角干) 김유신에 대해서는

그 무덤을 수리하는 것뿐 아니라

이들을 받드는 사당을 세우고자,

자신의 스승인 이퇴계(李退溪)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까지 세울 필요는 없으며

각간(김유신)에 대해서만 사당을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이정은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서악정사(西岳精舍)이다.

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薛聰)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이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33년(1600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옛 터에 초사(草舍)를 다시 지어 전란을 피해 보존된 위패를 모셨다,

1602년에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처음으로 사당 중건을 시작하였고,

광해군 2년(1610년) 강당과 동재(진수재)

서재(성경재),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새로 지었다.

 

인조 1년(1623년) 경주의 유학자였던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부윤 여우길(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1646년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고종 10년(1873년)과 고종 19년(1882년),

고종 29년(1892년), 고종 31년(1894년)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갖추었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시습당에는 서원의 학칙을 기록한 《원규》와 백록동규,

《국기(國忌)》, 《서악서원중수기 완의(完議)》,

《서악서원상량문》(1610년) 등의 기판과 영귀루에

《서악서원내해중건기》, 《영귀루중건기 및 중수기》 등이 남아 있다.

이외에 비석 1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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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하고 있는 읍천항을소개합니다.

다루에서 예전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 되었으나

자차이용시 터널이 완공하면서 1시간정도 걸립니다.
석굴암보고 불국사 보시고 읍청항으로 이동하시면 불굴사,기림사,감은사지,이견대,

문무대왕릉에서 읍천항 약 13분정도
소요되니 일정을 조정하시면 이동시간을 줄 일수 있습니다.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신라시대 부터 어업이 활성화 된 곳이라고 합니다.

바위가 많아 항구가 위치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은 장소이지만

항구 안쪽으로는 담벼락에 멋진 벽화들이

가득 들어찬 멋진 장소로

여행자 들이 찾아 볼만한 곳으로
시원하고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조용한 전형적인 어촌마을 입니다..

 

 

읍천항 벽화마을과 주상절리와 거리는약 4분 거리입니다

읍천항의 벽화는 한국수력원자력 월성원자력 분부에서

2010년 첫 공모전 작품 53점을 시작으로
매년 40~50점의 작품을 추가하여

현재는 2km 구간에 210여점의 경주와 어촌의 풍경
다양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단체관광차의 경주여행코스 이기도합니다.

 

읍천항의 벽화는 바다에 포커서를 둔

태마가 다양하고,어떤 각도에서 보는냐에 따

사진이 멋있어지는것 같습니다.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며

가족과 친구 연인들의 바닷가 산책코스로 좋습니다.

규모는 전국 최대 규모의 읍천항의 벽화는

공모전을 통해 우수한 작품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간혹 대충한것 처럼보이는것도 있구요

 

한마디로 야외 갤러리라고 표현하는것이 맞을것 같아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해마다 공모전을 펼쳐

새로운 벽화를 찾아 볼 수 있는 읍천항.

경주여행 가족,연인과 친구들이 함께 손 꼬옥 잡고

아름다운 벽화 바라보며 추억 남겨 볼 수 있는
경주의 벽화갤러리 읍천항이라 생각됩니다.

 

 


 위이미지로 만든 영상입니다.

 

예전에 만든 읍천항 영상입니다...

 

 

Posted by DARU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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